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흑백영화의 한장면같은 기억.
가끔 우리집을 드나들었던 순희 언니
풀죽은 모습으로 가끔 찾아와 엄마와 얘기를 나누다 가곤 하였다.
높은 뜰팡에 높은 마루와 높은 문턱안에 깊은 방으로 되어있는 초가집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듯했지만 요즘처럼 밤새 난방을 하지 않고
초저녁 구들장을 데워 긴밤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새벽이 되면 식어버려서
아침일찍 군불로 다시 데워지는 아랫목 늦잠은 달콤하기만 했었다.
아마 이맘 때 쯤의 겨울이었을까 부산하게 움직이는 엄마의 아침준비에
달그락 달그락 푸푸거리며 김을 내 품는 가마솥의 열기와 하얀 김과 연기로
자욱한 부엌에선 엄마의 동선이 바쁘기만 하다.
찬물에 쌀을 싹싹 씻어 조리질로 돌을 골라 밥을 앉혀놓고 뽀얗게 받아놓은
쌀뜨물에 김치 우거지를 쫑쫑 썰어넣고 멸치로 맛을내어 끓이는 짓잎국을 끓이며
양쪽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엄마는 양쪽아궁이의 불을 발로 밀어넣고 넘치는
밥물을 행주로 닦아내며 마늘을 찧고 대파를 다듬어 국에 양념을 하고
때론 나물도 볶고 생채도 하고 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하건만 새벽에 웅크려졌던
몸이 다시 데워진 구들장에 녹아들어버린 우리들은 이불속늦잠이 달콤하기만 했다.
바쁘게 부엌을 오가는 엄마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우리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바삐 아침을 준비하시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데는 30년이
넘게 걸렸다.
그런 어느 해의 겨울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의 발소리를 들으며 꿈지럭
거리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시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궁금증에 이불 밖으로
나와 자벌레처럼 기지개를 켜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푸푸거리며 밥물을 내뿜는 가마솥의 밥물을 연신 닦아내는 엄마와 아궁이의 불을
부지깽이로 고르고 있는 순희 언니가 뜨거운 김과 연기로 자욱한 부엌에서 꼭
자욱한 안개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구수한 밥냄새를 품은 하얀 김과 불내를 품은 연기가 뒤범벅이된 부엌으로 들어가니
순희언니는 훌쩍훌쩍 눈믈을 찍어내며 울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눈물을 훔치던 순희 언니는 소맷 자락으로 얼른 눈물을 닦고 밝은 미소로
레미 일어났니? 으이구 추운데 이쪽으로 와라~ 이쪽 아궁이 앞으로 와~ 하며
아궁이 속의 벌건 재를 앞으로 끄집어내며 한쪽으로 비껴 앉는다.
순희 언니와 나란히 앉아 불을 쪼이고 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등을 쓰다담기도 하면서
레미는 참 좋겠다. 참 좋겠다.~ 하고
우리엄마는 순희야 짓잎국에 밥말아서 얼른 먹고 가거라.
너 속상한거는 내가 다 안다.
그려도 엄니잖여? 엄니도 니가 미워서 그러겄냐~ 사는것이 힘들고 어려우니께 그러는 겄이지.
참고 이겨내야지 어쩌겄냐. 힘들고 어려우면 하소연 하러와~ 내가 다 들어줄팅게. 순희야.
그려유 아줌니 아줌니한티 얘기라도 하고 나면 맘이 조금 풀려유. 지가 누구헌티 이런 얘기를
하겄어유.
순희 언니는 뜨거운 짓잎국에 밥을 말아 맜있게 먹는다.
그 모습이 어리던 나는 왜그렇게 슬퍼 보였던지 슬픔을 꾸역꾸역 삼키는것 처럼 보여서 내가
목이 메어와 지금까지도 그날의 순희 언니를 잊지 못한다.
일찍 엄마를 여의고 새엄마와 사는 순희 언니는 늘 그렇게 정에 목말랐고 얘기에 목이 말랐다.
말없이도 통하는 정에 마음속 깊은 얘기를 나눌 상대에 늘 목말라 했었던것 같다.
새 엄마와 갈등이 있을 때면 쪼르륵 달려와 우리 엄마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하고 가던
순희 언니의 마음이 세월이 갈 수록 깊이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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