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의 감성
지난 일요일 아침 탱감은 꼭두새�에 눈도 잘 못뜨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한낮 뜨겁기전에 자전거 타기 하자며 부산을 떨고 다닌다.
엎드려 자벌레처럼 웅크리고있는 내엉덩이를 걷어차며
"서래섬 유채꽃이 한창이랴. 유채꽃 보러가자구."
"아이구 내가 극성 맞은 서방땜시 몬살어."
새�바람을 가르며 한강을 거슬러 서래섬 유채꽃밭을 들렀다.
"에구 유채꽃이라구 찌질허구먼. 안양천 유채만도 못허네."
그렇게 한강거스르기를 하고 돌아와 쓴내나는 점심을 먹을때
분당사는 동생한테 전화가온다.
연휴를 맞아 친정집을 다녀왔는데 어머님께서 싸주신 먹거리를
들고 오겠단다.
"뭣이 집에다녀와서 피곤헐텐데 내일 우리가 가지러갈께."
"아녀 언니 내가 바로 갈테니까 형부가 전철역까지만 나와줘."
으매 그애보다 내가 피곤혀 죽겄구먼. 점심 설겆이 하고 낮잠이나
한숨 잤으면 딱 좋겠는데 굳이 온다냐.
동생은 양손가득 챙겨들고 그 먼길을 한숨에 달려왔다.
집에 다녀와서 우선 챙겨둘것만 챙겨두고 뒷광에 널부러트린채
달려왔다고 숨을 몰아쉰다.
그동안 가깝게 출퇴근하다가 이천으로 발령받아 먼길을 출퇴근하는
동생이 힘들어도 살림쟁이인 나는 아무 도움도 못주고 늘 맘만 짠
한데 바지런한 동생은 살림까지 똑부러지게 한다.
"언니 엄마가 다왔는데 또 큰딸만 못 와서 걸린다고 어찌나 섭섭해
하시는지 내가 갔다준다고 싸가지고 왔어. 이 쑥 가래떡을 빼 놓으시고
이떡이 굳기 전에 먹어야 되는데 못 먹는다고 으이구 엄마두 참."
쑥 가래떡에 쑥 반죽 고사리 삶은거 머위대 삶은거 비름나물 미나리등등.
칠십 중반 노모는 아직도 일곱 자식들 먹거리 대부분을 직접 거두어 대신다.
살림 쟁이인 나를 빼고는 장과 김치 햇 나물과 묵나물들을 거두어 주신다.
자식들이 오면 그동안 모아놓으신 먹거리들을 냉동실 문을 열고 한덩이씩
바윗돌 던지시듯 던지신다.
" 자 자네도 한덩이 자네도."
"예 어이쿠, 우리 장모님 투포환 선수 허셨으면 잘 허셨겠어요."
" 투포환이 뭣여."
"이렇게 단단한 쇳덩이를 멀리던지는 경기예요. 장모님이 하셨으면 국가
대표는 따논 당상였을건디."
그렇게 신이나서 던지고 받고 농을 주고받고 자동차 바퀴가 물렁하게 주저
앉아도 행복하다.
우리가 어릴적엔 항상 빠르고 부산한 엄마가 싫었다.
다소곳하고 얌전한 다른집 엄마들이 부러웠었다.
왜 그러고 싶지 않았을까. 깔끔하게 차려입고 다소곳이 멋 내고싶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다소곳한 체면을 벗어던지셨다. 일곱자식 배불리고 가르치겠다고.
항상 바쁘고 씩씩하고 억척스러우셨던 어머니, 멋을 낼줄도 모르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 했었다.
동생과 집에 다녀온 얘기를 나누고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아쉬워서 집에서 낸
차와 액기스 봄 산나물과 채첩을 싸 보내고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전화가 온다.
"처형 이렇게 남는 장산디 저 매일 처형네집에 가야겠어요."
"그려요. 담부터는 제부가 와요.그러면 더 이문 붙여 줄팅게. 에고 집에 다녀오면
피곤한데 다녀간 동생이 걸리네요."
"아녀요. 딴때같으면 피곤허다고 우선 드러눕고 마는사람이 오늘은 언니네 가얀다
먼서 점심 설겆이도 안허고 달려가대요. 그래서 설겆이는 제가 했잖여요. 참 그려도
형재간에 서로 우애좋은거 보면 저는 그게 부러워요. 저흰 장모님 뵈러갈때 빈차로
갔는데 돌아올때는 차 가득 싣고 왔다니께요."
" 빈 차로 가다니요. 사위 사랑을 가득 싣고 갔잖여요."
"처형 제 얘기좀 들어보셔요. 마당가에 솥단지 걸어놓으셨잖아요. 그옆에 함밧꽃이
참 크고 이쁘게 피었더라구요. 그런데 장모님이 그 솥단지에 불을 지피시다가 그
꽃을 보시고 혼잣말씀을 하시는데 '너는 이렇게 이쁘게 피었는데 볼 사람이 나혼자
밖에 없구나. 여러사람 보는데서 피었으면 얼마나 이쁘다 소리를 들었을텐데 너는
어쩌다 나 혼자 사는집에 피었니.' 허시는데 와 우리 장모님 그 감성에 감탄혔어요
시인이시더래니까요."
"하하하 그랬어요."
"아니 진짜예요. 우리 장모님 감성이 살아 있으시더래니까요. 저희는 그냥 씩씩하신
노인으로만 생각 혔는데 장모님 혼잣말씀 하시는거듣고 가슴이 뭉클혔어요."
"고마워요 제부 그 감성을 알아주는 제부 멋쟁이고 고맙네요 제부도 시인여요."